2026.02.02 (월)

  • 맑음동두천 -2.3℃
  • 맑음강릉 1.5℃
  • 맑음서울 -1.0℃
  • 맑음대전 -1.6℃
  • 맑음대구 0.6℃
  • 맑음울산 0.4℃
  • 구름조금광주 -0.6℃
  • 맑음부산 1.7℃
  • 맑음고창 -1.3℃
  • 흐림제주 4.4℃
  • 맑음강화 -1.8℃
  • 맑음보은 -2.1℃
  • 맑음금산 -1.3℃
  • 맑음강진군 0.4℃
  • 맑음경주시 0.6℃
  • 맑음거제 2.6℃
기상청 제공

[김우일의 세상 돋보기]‘김원봉과 백선엽’ 서로 다른 삶의 길

(조세금융신문=김우일 대우M&A 대표) 일본강점기 일본을 공포로 몰아넣은 독립투사 약산 김원봉에 대한 논란이 정치권을 둘러싸고 거세지고 있다.

 

진보 측에서는 일제시대 암흑기에 민족의 분노를 거리낌 없이 표현 한 약산이야말로 진정한 독립투사임을 인정하고 비록 북한정권에 기여했지만 가로 늦게나마 그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인정해야 된다는 입장인 반면, 보수 측에서는 북한건국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6·25 전쟁에도 깊숙이 관여했기에 현재의 분단사태에서는 곤란하다는 입장이다.

 

김원봉은 경남 밀양 출신으로 1916년 중국으로 건너가 난징의 진링 대학, 황푸군관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1919년 3·1운동 소식을 듣고 의열단을 조직하여 무정부주의적 항일투쟁활동을 시작했다. 6여년에 걸쳐 의열단 단장으로 일본군부 암살, 경찰서, 동양척식회 사 등에 대한 폭탄투척 사건을 주도함으로써 일본의 간담을 서늘케 했을 정도로 무력항쟁을 지속하였다.

 

당시 독립운동의 태두였던 김구보다 일제가 걸었던 현상금이 높았다 할 정도로 우리나라 독립투쟁에 있어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하였다 해도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후 연합투쟁의 필요성을 느끼고 김구와 함께 공동정강 하에 분열된 여러 독립투쟁조직을 규합하여 단일조직으로 추진하기도 했다. 이렇게 그의 독립투쟁운동이 분명함에도 해방 이후 75년이 지난 후 지금까지도 극명하게 진보, 보수 양측에서 분란이 있는 이유는 해방 후 자진 월북하여 김일성 북한정권에 기여했다는 점 때문이다.

 

물론 그는 남한에서의 친일파 세력에 의해 환멸을 느껴 월북했고 추후 김일성에 의해 숙청되었지만 그의 공과 과는 극명하고 분명하게 설명될 수가 있을 것이다. 필자는 약산 김원봉에 대한 잘잘못의 평가를 유보하고 우리 민족 이 암흑기로 살아온 동시대에 서로 다른 삶을 살았던 두 사람을 대비, 비교해봄으로써 그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한지 여부를 나름대로 성찰해봤으면 한다.

 

본래 한 사람에 대한 평가는 본인에만 국한한 삶의 여정만을 가지고는 진정한 평가를 하기 어렵다. 동시대의 다른 삶을 유추 비교해봄으로써 주변의 환경에 대해 그가 가진 내면의 깊숙한 동기와 가치를 왜곡과 편견 없이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대에 다른 삶의 길을 살았던 사람으로 대비해볼 인물은 바로 백선엽 장군이다. 바로 6·25전쟁 영웅으로 5성장군의 명예원수로 추대되었던 적이 있을 정도로 그는 한미동맹의 상징적인 인물로 칭송되기도 했다.

 

그는 평안도에서 태어나 평양사범학교에 졸업하고 일본 육사의 분교인 만주봉천군관학교에 입학했다. 입학 동기는 일본 최상층인 일본군인 장교가 되는 것이 그의 꿈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육사에 들어가는 사람은 일왕과 일본군에 충성을 맹세하고 스스로 중국대한임시정부의 적이 돼 항일독립군과 전투를 해야 하는 줄 알면서도 그 길을 간 것이다.

 

백선엽은 독립투사를 토벌하는 조선인 출신으로 만든 간도특설대에 근무했다. 당시 간도특설대는 독립군에 대한 가장 악랄한, 잔혹한 활동으로 유명했고 이 때문에 간도특설대원은 사병까지 전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해방 후 그는 평양에 돌아와 민족주의 지도자 조만식의 비서로 활동하다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하던 김일성이 북한에서 부상하자, 본인의 전력이 밝혀지는 것이 두려워 남한으로 도피했다.

 

군사영어학교에 입학, 이승만의 총애를 받으며 6·25 전쟁에 초고속승진을 거듭 별 넷 장군으로 승승장구했다. 4·19혁명 후 군부쇄신 운동에 밀려 예편했다. 이후 만주국 장교 출신인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자 각국 대사를 거쳐 교통부장관, 국영기업체 사장을 거치고 각종 무공훈장을 받고 전쟁의 영웅, 국군의 아버지로 대접받았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두 사람, 김원봉과 백선엽, 같은 민족에 같은 무인의 길을 걸으면서도 서로 다른 삶의 여정을 택했던 두 사람. 해방 전에는 한쪽은 독립투사, 한쪽은 일본군인으로, 해방 후 한 쪽은 평생을 싸워온 친일파와 김일성에 의해 처형됐고, 다른 한쪽은 친일파 때문에 승승장구 전쟁영웅으로 부상되었던 아이러니한 상반된 이 삶의 가치를 가슴속에 음미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프로필] 김 우 일

•대우김우일경영연구원 대표/대우 M&A 대표

•전)대우그룹 구조조정본부장

•전)대우그룹 기획조정실 경영관리팀 이사

•인천대학교 대학원 경영학 박사

•서울고등학교, 연세대 법학과 졸업

 

[조세금융신문(tf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전문가 코너

더보기



[김우일의 세상 돋보기] 미 최강 델타 포스에서 경영을 배운다
(조세금융신문=김우일 대우M&A 대표) 미국의 최강부대인 육군 최정예부대 델타포스가 전광석화와 같이 수백 기의 비행기를 동원하여 베네수엘라 수도를 폭격, 암흑으로 만든 다음 저고도로 나는 헬기로 거처에 침투하여 반미·친중 국가인 남미의 베네수엘라 대통령 마두로 부부를 체포해 미국 심판대에 세웠다. 여기에 세계 여론은 두 갈래이다. 하나는 베네수엘라가 그간 보인 반미 행보가 트럼프의 분노를 샀기에 인과응보라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그래도 주권국가임에는 틀림없는데 무력으로 독립국가의 정권을 붕괴시킨 것은 유엔 헌장과 국제법상 불법이라는 것이다. 어찌 됐던 필자는 이 전무후무한 델타포스라는 특수부대의 전략에 경악을 금치 못했고, 이 부대가 가진 특수성에서 경영의 길을 찾아보고자 하는 새로운 호기심이 폭발했다. 1977년 직접타격·대테러전을 염두에 두고 창설된 부대로, 특수부대 출신 군인 중에서 다시 침투와 탈출, 근접전, 사격, 폭파, 구출 등의 고된 훈련을 마친 후보 중 90%가 탈락하고 남은 후보에서 다시 뽑아 만든 특수부대의 특수부대이다. 외부에 대한 절대 비밀 보안을 위해 부대원들의 신상 모두가 비밀이며, 외모도 군인형이 아니라 일반인 모습으로 행
[초대석] 정재열 관세사회장 "마약· 특송·외화 밀반출 등 국경관리...관세사가 앞장"
(조세금융신문=안종명 기자) “1976년 관세사 제도가 처음 생길 때 우리나라 수출액이 80억 달러였습니다. 지금은 1조 3,000억 달러를 넘보는 세계 10위권 무역 강국이 됐죠. 지난 50년이 우리 존재를 증명한 시간이었다면, 앞으로의 50년은 국가 무역 안전망의 ‘재설계’ 기간이 될 것입니다.” 대한민국 경제의 심장부, 강남. 빌딩 숲 사이로 겨울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던 날, 기자는 한국관세사회 회장실을 찾았다. 문을 여는 순간, 바깥의 냉기와는 대조적으로 따뜻한 온기가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지독한 독감으로 고생했다는 소식이 무색할 만큼, 정재열 회장은 밝은 미소로 기자를 맞이했다. 그 미소 뒤에는 창립 50주년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변곡점을 지나온 수장으로서의 고뇌와 확신이 함께 담겨 있었다. 마주 앉은 그는 차 한 잔을 건네며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 경제와 궤를 같이해 온 한국관세사회의 발자취를 차분히 되짚었다. 그의 시선은 과거의 성과에 머물지 않았다. ‘새로운 100년’을 향한 다짐 속에서, 혁신을 향한 굳건한 의지는 또렷이 전해졌고, 그 울림은 강남의 차가운 겨울 공기마저 녹이기에 충분했다. 80억 달러 수출국에서 1.3조 달러 무역 강국으로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