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2.04 (수)

  • 맑음동두천 -3.4℃
  • 구름많음강릉 3.1℃
  • 흐림서울 1.2℃
  • 구름많음대전 -2.3℃
  • 구름많음대구 -1.6℃
  • 구름많음울산 2.0℃
  • 구름많음광주 0.0℃
  • 구름많음부산 3.3℃
  • 맑음고창 -2.7℃
  • 맑음제주 3.0℃
  • 구름많음강화 -2.4℃
  • 구름많음보은 -4.4℃
  • 구름많음금산 -4.0℃
  • 흐림강진군 -0.3℃
  • 구름많음경주시 1.8℃
  • 구름많음거제 1.7℃
기상청 제공

문화

[클래식&차한잔]만개하지 못한 재능...잊혀진 여류 음악가

(조세금융신문=김지연 음악전문기자 · 이레피아노학원 원장) 서울시 자원봉사센터의 통계에 따르면 서울 지역의 평창동계올림픽 자원봉사자 남녀비율이 2대8로 여성이 남성의 4배라고 합니다. 준비되지 않은 열악한 현지센터의 시설과 매서운 혹한으로 추위에 고통을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정신적인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도 묵묵히 어려움을 감당해내는 그녀들.


자원봉사의 질에 따라 올림픽의 성패가 좌우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자발적인 참여도가 중요한데 이런 통계를 볼 때마다 ‘대의’를 위해 수고를 기꺼이 감당하는 여성 자원봉사자들에게 경외심마저 듭니다.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남성보다 더 거침없이 펜을 휘둘렀던 박경리의 「토지」를 다시 읽어봅니다. 장장 26년의 집필기간이 걸렸던 20권 분량의 대하소설이지요. 그녀는 여자여서 힘든, 하지만 여자이기에 가질 수 있는 아픔과 오기. 그것이 원동력이 되어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근대사를 면밀히 볼 수 있는 거대한 역사소설을 집필할 수 있었습니다.


박경리의 ‘재봉틀 한 대’를 아십니까?


“실패하면 이걸로 삯바느질한다. 대신 내 문학에 타협은 없다.” 공지영 씨가 말하는 1959년 문학에 등단하면서 다짐했던 박경리의 말입니다. 고통을 많이 겪어보고 지칠 대로 지친, 애 딸린 젊은 미망인 박경리는 이렇게 누군가에겐 너무나 쉬워 보일 수도 있는 문학이란 것을 비장하고도 처절한 고집으로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편견과 남성들이 만들어 놓은 철벽 사이사이를 뚫고, 빛나는 재능을 발휘하여 꽃을 피웠던 누군가의 누이, 누군가의 아내… 그렇지만 그 ‘누군가’를 가히 능가하는 천부적인 능력을 지녔던 여성음악가들.


모차르트의 누이 ‘난네를’, 멘델스존의 누나 ‘파니 멘델스존’, 슈만의 아내 ‘클라라 슈만’.
맘껏 펼쳐보지도 못한 채 묻혀버렸던 안타까운 재능을 가진 여류음악가들을 소개합니다.


마리아 안나 모차르트(Maria Anna Walburga Ignatia Mozart 1751-1829)
동생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보다 먼저 재능을 보여주었던 난네를(안나 모차르트). 모차르트보다 5살 연상인 그녀는 11세 때부터 6세였던 동생과 함께 유럽연주여행을 다녔다고 합니다.

 

어린 난네를은 피아노를 연주하였는데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모차르트보다 출연료를 더 받았다고 하지요.


모차르트가 음악적 재능을 꽃피우게 된 것은 하프시코드와 피아노 연주자, 작곡자, 성악가,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누나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음악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모차르트는 후에 장성하여 작곡한 협주곡들을 누나에게 보내 조언을 구했다고 합니다. 모차르트가 작곡한 다섯 곡의 ‘네 손을 위한 소나타’ 피아노 연탄곡은 모두 누나와의 연주를 위한 곡이었다고 하죠.


난네를은 성장하면서 가정과 결혼에 묻혀 그대로 재능이 덮여졌는데, 모차르트 사후에 그와의 편지 등 귀중한 자료들을 내놓으면서 후대의 연구자료로 쓰일 수 있도록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파니 멘델스존(Fanny Mendelssohn 1805-1847)
펠릭스 멘델스존의 누나. 멘델스존의 집안은 부유한 은행가 집안이었던 것으로 유명하죠.

 

어려서부터 음악교육을 받기 시작했고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지만 아버지의 강한 반대로 정식음악가로서의 데뷔는 엄두조차 내지 못했습니다. 그는 딸의 연주는 물론 작품을 출판조차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파니는 결혼 후 동생과 남편의 도움을 받아 아마추어로 활동을 간간이 했는데 동생 펠릭스 멘델스존은 “나보다 누나의 음악적 재능이 더 뛰어나다”고 칭찬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비공식적으로 피아노 중심의 460여 곡을 작곡하였고, 마침내 평생소원이던 소규모의 정식음악회를 준비하다가 갑자기 쓰러져 인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몇 달 뒤 그 슬픔과 충격으로 ‘펠릭스 멘델스존’도 뇌졸중으로 생을 달리하게 되죠)


클라라 슈만(Clara Schumann 1819-1896)
피아노 교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5세 때부터 피아노를 접하고 9세 때 첫 연주를 시작하여 20세 결혼할 때까지 세계적인 피아노연주자로 이름을 날렸으니 그나마 전문연주자로서 잠시나마 활동을 활발히 했던 사람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녀는 수많은 작품을 작곡하였고 출판까지 하였습니다.


하지만 슈만과의 결혼 이후 8명의 자녀를 양육해야 했고, 남편의 죽음 이후엔 생계에 짐까지 떠맡게 되어 순수창작을 위한 활동은 접어야만 했지요.

 

그리고는 남편의 제자인 브람스와 함께 슈만의 생전작품을 정리하고 그것을 연주하며 음악을 알리는데 여생을 보냅니다. 음악가이자 작곡가인 남편 슈만과 결혼하면서 그녀는 여류음악가를 보는 사회적 시선을 느끼고 타협하기에 이릅니다.


“나는 한때 창조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이 생각을 접었다. 여성은 작곡가가 되길 바라서는 안 된다. 아무도 그러지 못했다. 근데 왜 내가 굳이 해야 하나!”


여류음악가를 인정하지 않는 시대에 태어나서 재능을 억누르고 살았던 그녀들.
눌러도 감추어도 빛날 수 밖에 없었던 그녀들의 예술적 재능은 그녀들의 형제에게, 남편에게 조용히 기대어 살짝살짝 비추어질 수 밖에 없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과거의 여성들은 그녀들의 재능을 세상에 드러낼 때 왜 그리 고통스러워야 했는지...


박경리에게 문학이 그러했듯, 비범한 재능을 지닌 그녀들에겐 음악을 한다는 것이 왜 그리 처절한 몸짓이었는지...

 

[조세금융신문(tf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전문가 코너

더보기



[이명구 관세청장의 행정노트] 공정의 사닥다리
(조세금융신문=이명구 관세청장) 며칠 전, 새로 전입한 사무관들과 조용한 만남의 자리를 가졌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어떤 말을 전해야 할지 잠시 생각하다가, 결국 두 가지만을 강조했다. 인사를 잘하라는 것, 그리고 돈을 멀리하라는 것이었다. 이 말은 새로 만든 조언이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내가 사무관이던 시절 같은 과에서 근무하셨던 한 선배 사무관께서 해주신 말씀이었다. 그때는 그 의미를 다 헤아리지 못했지만, 공직의 시간을 오래 지날수록 그 말은 점점 더 분명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그날, 나는 그 말씀을 그대로 후배들에게 전했다. 인사는 결국 사람을 남기는 일이고, 돈을 멀리하라는 말은 공직자의 판단을 흐리는 유혹과 거리를 두라는 경고였다. 공직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긴 항해이기에, 처음부터 방향을 잘 잡지 않으면 어느 순간 되돌아오기 어려운 곳으로 흘러가게 된다. 덧붙여 이런 이야기도 했다. 너무 경쟁하듯이 하나의 사다리만 오르려 하지 말고, 각자의 사닥다리를 각자의 속도로 차분히 오르기를 바란다고. 레드오션처럼 한 방향으로 몰려 달리다 보면, 사닥다리가 무너질 수도 있고 병목현상 속에서 누군가는 추락할 수도 있다. 성과와 평가
[초대석] 정재열 관세사회장 "마약· 특송·외화 밀반출 등 국경관리...관세사가 앞장"
(조세금융신문=안종명 기자) “1976년 관세사 제도가 처음 생길 때 우리나라 수출액이 80억 달러였습니다. 지금은 1조 3,000억 달러를 넘보는 세계 10위권 무역 강국이 됐죠. 지난 50년이 우리 존재를 증명한 시간이었다면, 앞으로의 50년은 국가 무역 안전망의 ‘재설계’ 기간이 될 것입니다.” 대한민국 경제의 심장부, 강남. 빌딩 숲 사이로 겨울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던 날, 기자는 한국관세사회 회장실을 찾았다. 문을 여는 순간, 바깥의 냉기와는 대조적으로 따뜻한 온기가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지독한 독감으로 고생했다는 소식이 무색할 만큼, 정재열 회장은 밝은 미소로 기자를 맞이했다. 그 미소 뒤에는 창립 50주년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변곡점을 지나온 수장으로서의 고뇌와 확신이 함께 담겨 있었다. 마주 앉은 그는 차 한 잔을 건네며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 경제와 궤를 같이해 온 한국관세사회의 발자취를 차분히 되짚었다. 그의 시선은 과거의 성과에 머물지 않았다. ‘새로운 100년’을 향한 다짐 속에서, 혁신을 향한 굳건한 의지는 또렷이 전해졌고, 그 울림은 강남의 차가운 겨울 공기마저 녹이기에 충분했다. 80억 달러 수출국에서 1.3조 달러 무역 강국으로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