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7 (수)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전문가칼럼]외국환거래법에 따른 자본거래 신고 의무 ①

(조세금융신문=신민호 관세사·경제학박사) 외국환거래법의 자본거래란 물품의 국제적인 매매거래(무역거래)와 용역(서비스)의 국제적인 거래(용역거래)를 제외한 예금계약, 신탁계약, 금전대차계약, 채무보증계약 등에 따른 채권의 발생·변경 또는 소멸에 관한 거래를 의미한다.

 

[표1] 외국환거래법령상 자본거래

(법=외국환거래법, 영= 외국환거래법시행령, 법 3-1-XIX= 외국환거래법 제3조 제1항 제19호, 영 9-1-2= 외국환거래법 시행령 제9조 제1항 제2호)

 

 

 

[표2] 신고 및 허가 예외 자본거래(외국환거래규정 제7-2조)

 

자본거래에 대한 외국환거래법에 따른 신고의무

 

외국환거래법령상 자본거래는 거래 유형이나 거래 내용이 위 [표 1]에서 보듯 매우 다양하여 그 간의 지속적인 자유화정책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신고제의 기본적인 틀을 유지하고 있다.

 

무역거래나 용역거래와 같은 경상거래에 비하여 자본거래는 다양한 거래 유형이나 내용을 악용하여 국내 자본을 불법적으로 유출하거나 유입하여 외환보유고나 국제수지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음에도 정부가 그 거래내용이나 진실성을 파악하기가 용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업의 외국환거래법에 따른 성실한 자본거래 신고의 중요성

 

우리나라는 부존자원이 없는 나라로 무역거래를 통해서 성장하고 발전해왔다. 특히 1997년 외환보유고의 부족으로 IMF외환위기를 겪은 후부터는 외환수급에 대한 통계를 확실히 하기 위하여 자본거래를 포함한 각종 외환거래에 대한 신고의무를 부여하고 있다. 자본거래를 하는 기업의 외국환거래법에 따른 신고는 외환수급에 대한 통계에 반영되어 외환정책 및 경제정책 수립에 대한 기초가 되므로 성실하게 신고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고 및 허가 예외 자본거래

 

외국환거래법령 및 규정에서는 다음의 자본거래를 신고나 허가를 요하지 않는 자본거래로 규정하고 있다.

 

[프로필] 신민호 대문관세법인 대표 관세사
• 한양대학교 정치외교학과/경제학박사(국제상무전공)
• 건국대학교 대학원 국제비즈니스학과 겸임교수
• 전) 남경관세사무소 대표
• 전) 법무법인 충정 관세팀장
• 전) 법무법인 율촌 택스파트너
• 전) 미국 워싱턴DC 대형로펌 스텝토앤드존슨 파견근무

 

[조세금융신문(tf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배너

전문가 코너

더보기



[인터뷰] 임채수 서울지방세무사회장 권역별 회원 교육에 초점
(조세금융신문=이지한 기자) 임채수 서울지방세무사회장은 지난해 6월 총회 선임으로 회장직을 맡은 후 이제 취임 1주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임 회장은 회원에게 양질의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지방회의 가장 큰 역할이라면서 서울 전역을 권역별로 구분해 인근 지역세무사회를 묶어 교육을 진행하고 있어 회원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올해 6월에 치러질 서울지방세무사회장 선거 이전에 관련 규정 개정으로 임기를 조정해 본회인 한국세무사회는 물론 다른 모든 지방세무사회와 임기를 맞춰야 한다는 견해도 밝혔다. 물론 임원의 임기 조정을 위해서는 규정 개정이 우선되어야 하지만, 임기 조정이라는 입장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은 처음이라 주목받고 있다. 임채수 회장을 만나 지난 임기 중의 성과와 함께 앞으로 서울지방세무사회가 나아갈 길에 대해 들어봤다. Q. 회장님께서 국세청과 세무사로서의 길을 걸어오셨고 지난 1년 동안 서울지방세무사회장으로서 활약하셨는데 지금까지 삶의 여정을 소개해 주시죠. A. 저는 1957년에 경남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8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대부분 그랬듯이 저도 가난한 집에서 자랐습니다. 그때의 배고픈 기억에 지금도 밥을 남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