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24 (토)

  • 구름많음동두천 17.6℃
기상청 제공

문화

[여행칼럼] 고려왕에게 진상했다는 젓국 갈비를 아시나요?

 

(조세금융신문=황준호 여행작가) 젓국 갈비라는 음식이 있다. 강화도 지역에서 최근 복원된 음식인데 그 유래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고려 무신정권 시절, 집권 세력은 침략한 몽골군에 대항하기 위해 강화도로 천도를 감행한다. 당시 강화도 백성들은 급하게 천도해온 왕과 관료들에게 먹을 것을 진상해야 했는데,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채소에 고기와 새우젓을 넣고 끓여 진상한 음식이 바로 젓국 갈비라고 한다. 이후 한동안 명맥이 끊겼다가 어느 식당에서 복원하였고, 현재는 그 조리법을 공개하여 강화도 대표 향토 음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왕과 관련된 음식 이야기 가운데 임진왜란 당시 선조 임금과 도루묵 이야기가 있다. ‘묵어’라는 생선을 피난길에 처음 맛본 선조 임금은 빼어난 맛에 ‘은어’라는 이름까지 붙여줬다. 그 맛을 잊지 못한 왕은 전쟁이 끝나고 궁에 돌아와 은어를 진상케 하여 다시 먹어봤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전에 먹었던 것과는 달리 맛이 형편없자 왕은 도로 ‘묵어’라 불러라 하였다 하여 ‘도루묵’이 되었다는 얘기, 젓국 갈비 역시 도루묵과 비슷한 처지의 음식이 아니었을까.

 

피난 오다시피 쫓겨온 왕과 집권 세력에게 마땅히 내놓은 게 없던 강화 백성들은 궁여지책으로 현지에서 구하기 쉬운 재료에 돼지를 잡아 고깃국을 진상하였고, 이후 고려 정권은 38년의 강화천도를 끝내고 다시 개경으로 돌아간다. 젓국 갈비의 명맥은 이때 끊긴 듯하다.

 

이후 젓국 갈비를 궁궐에 진상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이렇듯 수백 년 동안 명맥이 끊긴 사실에서 왕에게 고기는 흔한 음식이었겠지만 당시 백성들에게 돼지고기는 요즘처럼 일상으로 먹을 수 있는 식재료가 아니었기에 왕이 떠난 후 자연스레 명맥이 끊어지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최근에 복원하여 강화도 식당에서 내놓고 있는 젓국 갈비의 맛은 궁중음식의 특징과 비슷한 면도 없지 않아 보인다. 수라상에 올랐던 음식은 맛보다는 영양을 우선하여 중시했기 때문에 자극적이지 않고 소화가 잘되며 위에 부담 주지 않은 식재료들로 만들었다고 한다.

 

젓국 갈비는 맑은 국물에 갖은 채소와 두부 그리고 핏물을 뺀 돼지갈비를 넣어 한소끔 끓인 후 새우젓으로 간을 해가며 먹는데, 역시 궁중음식과 비슷하게 자극적이지 않아 거부감없이 먹기에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

 

 

 

또한 채소와 고기에서 우러난 육수는 서로 조화를 이뤄 시원하고 담백하며 부드러운 두부와 새우젓이 들어가서 소화에도 도움이 된다. 자극적인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싱거운 맛일 수 있으나 고기와 채소, 그리고 두부를 곁들여 먹다 보면 보양식 한 그릇 먹었다는 느낌이다.

 

요즘에는 강화도 식당 곳곳에서 젓국 갈비를 내놓는 집이 많아졌기 때문에 언제든지 쉽게 맛볼 수 있다. 어느 집이 맛있는지 굳이 따질 필요도 없다. 들어가는 야채 등 식당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겠으나 향토 음식으로 널리 알리기 위해 강화군에서 제공한 기본 레시피를 대부분 따르기 때문에 큰 차이가 없다. 다만 돼지고기 특유의 누린내에 민감하다면 누린내를 제거하여 내놓는 식당으로 가는 게 좋다.

 

지리적 여건상 나라의 굴곡진 역사를 고스란히 겪어온 강화도는 볼 것뿐만 아니라 이렇듯 젓국 갈비를 비롯하여 밴댕이, 순무, 새우젓 등 전국에서 최고를 자랑하는 먹거리가 풍부하다. 특히 젓국 갈비는 강화도에서만 맛볼 수 있다.

 

강화도를 여행한다면 잊지 말고 젓국 갈비가 어떤 맛인지 직접 맛보기를 권한다. 강화읍 내에서는 용흥궁 식당과 일억조 식당이 젓국 갈비로 알려져 있고, 전등사 입구 남문식당 역시 젓국 갈비로 알려진 식당이다.

 

고려궁지

 

 

몽골의 침략으로 당시 고려의 집권 세력이었던 최우가 항전을 위해 개경에서 강화로 도읍을 옮겨 38년 동안 사용했던 궁궐터이다. 강화도는 조석 간만의 차가 크고 조류 또한 빨라 수전에 약한 몽골군에 대항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당시 건립한 궁궐이 정궁(正宮) 이외에도 행궁(行宮)‧이궁(離宮)‧가궐(假闕) 등 많은 궁궐을 두었다고 하며, 왕을 비롯한 지배 귀족들은 피난 중에도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였다 하니 이들에게 나라의 흥망성쇠는 안중에도 없었음을 엿볼 수 있다.

 

용흥궁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재위 1849∼1863)은 구한말 직전의 마지막 임금으로 재위 14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짧은 재위 기간만큼 동학의 교주 최제우를 처형한 것 외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용흥궁은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으로 왕위에 오르자, 강화유수 정기세가 건물을 새로 짓고 용흥궁이라 하였다. 용흥궁은 창덕궁의 연경당, 낙선재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을 따라 지어져 소박하고 순수한 느낌이 든다. 경내에는 철종이 살았던 옛집임을 표시하는 비석과 비각이 있다.

 

전등사

 

 

단군왕검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을 간직한 삼랑성 내에 자리를 잡고 있는 전등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자 강화에서 제일 큰 절이다.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에 아도화상이 처음 창건하고 진종사(眞宗寺)라 이름 지었다.

 

처음 마니산에 설치하였던 사고를 1660년 이곳 전등사 경내로 옮겨 1678년이래. 실록 및 서적을 보관하였고 그 후 정족산 사고가 복원되었다. 경내에는 보물 제393호 범종을 비롯하여 다양한 문화재가 남아있다.

 

광성보와 갑곶돈대

 

 

 

광성보는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로, 강화 천도 후 몽골군에 대항하기 위해 조성한 성보(城堡)로 이후 수백 년 동안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와 구한말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해협으로 쳐들어오던 서양 군대와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졌던 격전지다. 광성보와 이어진 갑곶돈대 역시 망루 역할과 방어전을 펼치던 곳으로 강화도에는 갑곶돈대를 비롯하여 모두 54곳의 돈대가 설치되어 있다.

 

 

[프로필] 황준호(필명: 黃河)

•여행작가

•(현)브런치 '황하와 떠나는 달팽이 여행' 작가

•(현)스튜디오 팝콘 대표

•(현)마실투어 이사

 

 

[조세금융신문(tf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전문가 코너

더보기



[데스크 칼럼] 젊기도 설워라커늘 짐을 조차 지라고 해서야
(조세금융신문=손영남 편집국 부국장) 식당이나 술집 계산대 앞에서 옥신각신하는 모습은 우리에겐 일상과도 같다. 서로 내겠다며 다툼 아닌 다툼을 벌이는 모습이야말로 그간의 한국 사회를 대변하는 상징적인 모습이었달까. 주머니의 가벼움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그런 대범함(?)은 그만큼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깔려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앞으론 그런 훈훈한 광경을 보지 못하게 될 확률이 높다. 요즘의 젊은 친구들, 그러니까 소위 MZ세대라고 불리는 층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먹지도 않은 것까지 계산해야 한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는 이들이 MZ세대다. 누구보다 실리에 민감한 세대인 탓이다. 그들을 비난할 의도는 전혀 없다. 오히려 그게 더 합리적인 일인 까닭이다. 자기가 먹은 건 자기가 낸다는 데 누가 뭐랄까. 근데 그게 아니라면 어떨까. 바꿔 생각해보자. 다른 사람이 먹은 것까지 자기가 내야 한다면 그 상황을 쉬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더구나 그게 자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작금의 연금 개혁안을 두고 MZ세대들이 불만을 토하고 있는 현 상황이 딱 그 꼴이다. 어렵게 번 돈을 노후를 위해 미리 쟁여둔다는 것이 연금의 기본 골